“손녀에게는 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 1만 달러만 준다.”
“딸에게는 유한중, 공고에 있는 묘소 주변 땅 5000평을 물러준다. 이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며주기 바란다. 단, 유한동산에서 학생들의 티 없이 맑은 정신과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보고 느끼게 해주기 바란다.”
“아들은 대학까지 공부시켰으니 혼자서 자립해서 살도록 한다.”
“나머지 내가 가진 모든 재산, 즉 유한양행 주식 모두를 한국 사회 및 교육 신탁 기금에 기증해 뜻있는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에 쓰도록 한다.”
1971년 오늘(3월 11일) 신상(紳商)으로 존경을 받아온 유일한 박사는 이 같은 한 장짜리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. 20년 뒤 딸 재라 씨도 미국 시애틀에서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며 200여 억 원을 공익재단에 기부했다고 하니 ‘그 아버지에 그 딸’인 듯합니다.
유 박사는 서양문물의 힘을 깨달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9세 때 선교사를 따라 미국행 여객선에 올랐습니다.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변전소에 취직해 번 돈으로 미시간 주립대에 입학했습니다. 대학생 때에는 3.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음 달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‘한인자유대회’에서 연설문을 낭독하기도 했습니다.
그는 대학졸업 후 GE에 취직했지만 회사가 자신을 동양시장 개척을 위한 총지배인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사직하고 숙주나물 회사를 차립니다. 그는 숙주나물을 유리병이 아닌 통조림에 담아 파는 당시로서는 ‘아이디어 상품’을 개발했습니다. 또 이 상품을 알리기 위해 숙주 통조림을 실은 차를 몰아 길가의 상점 쇼윈도로 돌진하는 사고를 내고 언론을 타는 ‘데미지 마케팅’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.
그 는 미국에서 거금을 벌고 있다가 세브란스 의전 에비슨 학장의 권유를 받고 귀국합니다. 이때 서재필 박사가 버드나무 상표를 제작해주었지요. 유 박사는 자진 납세 업체, 투명 경영 업체, 종업원 지주 회사의 모범을 보이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76세를 일기로 38년 전 오늘 세상을 떠났습니다.
이번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서울 구로구 오류동의 유한공고 안에 있는 유한동산에 가봐야겠습니다. 나누면 심신이 건강해진다죠? 두 딸에게 그 건강한 정신을 가르치고 싶습니다. 그 따뜻한 기운을 여러분 모두에게 나눠 드리고 싶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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